은기에게…
아빠가 은기와 우리 가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어.
그동안 아빠의 어설프고 무책임한 간섭과 개입이 우리 가족과 은기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
주의와 주장에는 마땅히 그에 따른 책임이 따라야 하는데… 그동안 아빠는 고고한 척 말만 하고 책임은 회피하며 살았던 것 같아.
물론 아빠한테도 사정이 없지는 않지만, 변명은 하지 않을게….
2000년 12월 3일…
은기도 알다시피 아빠와 엄마는 결혼을 했어.
행복했지… 많이….
그리고 2003년 5월 2일, 첫째 은기가 태어났고,
아빠는 엄마가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은기를 낳는 순간 밖에서 그저 울고만 있었어.
그리고 아빠는 은기를 숨풍 낳아준 엄마한테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다 거짓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지.
그때는 진짜 그랬어….
아빠는 처음에 은기한테 젖을 물리는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
눈을 감고 있는 은기의 입에 엄마가 젖을 갖다 대는데, 그게 엄마도 처음이다 보니 젖을 들이대는 각도도 그렇고, 엄마 젖이 은기 입이랑 자꾸 어긋나는 거야. 많이 서툴었지… 엄마나 은기나….
은기도 아마 젖을 어떻게 빠는지 잘 몰랐던 거 같아… 겨우겨우 입에는 젖을 갖다 대었는데, 젖을 빨지 않는 은기에게 엄마는 울상을 하며 “어서 먹어…”를 연발했지.
그 때 엄마와 은기의 모습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
은기는 어려서 기억 못하겠지만…
그때는 아빠가 은기를 보기 위해 집에 일찍 들어왔던 것 같아.
엄마도 회사에서 집으로 간다는 아빠의 말에 유모차를 끌고 버스 정류장에 나와 있곤 했었지.
그리고 은기랑 함께 다니기 위해 처음으로 차를 샀어. 그 때는 참 운전이 무서웠는데…
그리고 2006년 5월 16일, 둘째 은수가 태어났지.
은수가 처음 집에 왔을 때 얘기는 은기한테 몇 번 했었지?
그 사이 우리 가족은 화곡동 다세대 주택에서 방화동 아파트로 집을 옮기고, 아빠 회사 출근과 그리고 보다 안정적인 주거를 위해 지금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인천에 집을 사서 이사를 왔어. 전세를 살면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했거든…
아파트 대출 이자에 그전보다 생활비는 더 많이 들어갔지만, 늘어난 생활비보다 훨씬 더 행복했던 것 같아.
지금도… 은기방에서는 엄마의 고함 소리와 은기의 울음소리가 들려….
아마… 스마트폰 때문인 것 같아.
스마트폰은 우리 가족의 관계를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조금씩 갈라놓았지.
은기만 탓하자는 게 아니라, 아빠도, 엄마도, 은슈도, 그리고 은기도….
스마트폰을 은기에게 주자고 처음 주장했던 사람은 아빠야. 엄마는 말렸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아빠는 결과에 대한 책임지지 못한 주장을 했던 것 같아.
그리고… 그 이후에 몇 번이나 스마트폰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웠지…
은기는 우리 가족 관계를 해치는 스마트폰이라면 차라리 안 쓰겠다고 다짐을 하는 편지를 아빠한테 준 적도 있고…
어제 엄마랑 은기와 우리 가족에 대해 긴 얘기를 했어….
아빠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빠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들었고.
사실… 상처를 좀… 아니 많이 받았어…. 알잖아, 아빠 속 좁은 거….
아무튼… 그동안 아빠의 간섭이… 은기한테는 이중간섭이었을 수도 있고, 또 엄마가 아빠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며 꼭 챙겨야 할 걸 챙기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생겼던 거 같아.
이제 아빠는 은기에 대한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맡기기로 했어. 아빠가 저지른 잘못까지 엄마한테 다 떠 넘기는게 미안하지만, 그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했어. 얼마전에 아빠는 은기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까지 했잖아?
엄마는 아빠보다는 훨씬 이성적인 사람이야. 그런 점에서 아빠는 참 많이 부족하지….
하지만 엄마도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은기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아빠가 은기한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
아빠가 반백년 가까이 살아보면서 느낀 건데, 사람은 크게 세 가지 일을 하면서 살더라구…
그 중 첫번째는 정보의 습득…
학교에 다니고, TV를 보고,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하는 것도 정보 습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두번째는 습득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을 만드는 시간…
정보만 습득한다고 그게 나의 것이 되지는 않아. 그래서 그걸 내 걸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해.
요즘 은기가 빠져 있는 화장만 하더라도, 은기가 화장을 어떻게 하는지 인터넷이나 친구들로부터 정보만 습득한다고 화장을 잘 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 직접 해 봐야지…
아빠가 은기한테 초등학교 때부터 1시간 동안 복습을 하라고 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야.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언제까지 정보만 습득할 순 없지…
예전엔 TV를 바보상자라고 불렀어…
요즘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들의 “디지털 치매”가 심각하다고 해.
마치 아빠가 담배를 끊지 못하듯…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은기에게 준 것…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아빠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인해 책임질 수 없는 주장을 한 것에 대해…
그때 엄마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만약에 은기가 정말 하고 싶은게 생긴다면… 그때는 그저 바라기만 하지말고, 구체적인 액션플랜을 짜서 하나씩 실천했으면 좋겠어. 세상에 그저 바라기만 한다고 이루어진다면 사는 게 이렇게 힘들진 않겠지…
마지막으로 다음날을 위한 충분한 휴식과 잠…
은기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했는데, 그래도 스마트폰에 의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엄마한테 얘기했으니까… 조만간 병원에 상담을 받으러 갔으면 좋겠어.
키 안큰다고 유전자 탓만 하지 말고, 은기가 키 크기 위해서 충분히 잠을 청하는지, 무엇이 잠에 방해가 되는지 한 번 스스로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어. 며칠 전에도 새벽 한 시까지 컴퓨터를 했잖아?
일에 빠져 사는 것이… 아빠도 행복하지는 않아.
가능만 하다면 집에서 가족과 함께(서로 모여서 각자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웃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빠도 가장 행복하고 바라는 삶이야.
명분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기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거라고 하지만…
그리고… 은평구청에 비해 서울시교육청이 정말 말이 안되게 바쁘기는 하지만….
요즘은 아빠가 왜,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앞에 썼듯이 앞으로 은기와 은수의 교육문제를 포함한 가족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엄마한테 위임할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더라도 엄마를 통해서 할 거고…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었던 것 같아. 아빠는 엄마처럼 은기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
은기야
어른은 키가 크고 몸만 자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가족에 대해, 그리고 더 넓은 주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해.
엄마와 의논해서 노트북은 곧 압수를 할 생각이야. 대신 거실에 데스크탑을 설치하기로 했어.
그리고, 스마트폰도… 은기가 스스로 절제할 수 없다면 모종의 협약을 통해 시간을 조절할 거고…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엄마와 아빠가 아니라 은기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것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은기가 꼭 이해할 날이 있을거야.
아빠도, 엄마도 그랬거든…
은기와 은슈는…
적어도 현재 엄마와 아빠의 유일한 존재 이유고, 행복의 근원이란다.
그렇다고 은기와 은슈를 속박하거나 가두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빠가 은기와 은슈를 믿는 것과 그저 방치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아빠는 그걸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아빠가 참 나쁘다.
이게 언제였지? 그나마 행복했던 가장 최근 아닐까?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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