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싱숭하여 광석이형의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를 한 달음에 읽었더니 젠장, 마음이 더 생숭해졌다. 평소 가깝게 알고 지내면서 볼꼴 못볼꼴 다 봐왔던 터라, 의리를 지킨다고 시집을 다섯 권이나 사 여기저기 뿌려놓고 정작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책상 한 켠에 치워놓았던 시집이었다. 평소 시라는 게 마치 언어의 가식 덩어리같아 멀리 해왔던 이유도 있었고...
시집을 다 읽고 나니 돼지로 보였던 선배가 갑자기 부처로 보인다. 내가 그동안 함부로 내지르던 언어를 시인의 통찰과 성찰로 잘 벼려놓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시집을 읽는구나... 시집을 읽는 동안 나한테도 시마가 들었는지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는 게 조심스럽다. 그리고 된장, 고추장, 간장... 그 동안 마음 속에 꼭꼭 숨겨 놓았던 진심들이 빗장을 풀고 삐져 나온다. 이건 모두 선배이자, 증조할애비인 채광석 탓이다.
암튼, 그리고 며칠 후 시 낭송회에서 내가 낭송했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괴물의 시간
- 채광석
젊은 날 나는
시대 감정에 갇혀 몇몇 연애들을 실패했다
혁명하는 법을 배웠어도 늘 서툴렀는데
사랑도 그랬다 몇몇 연애들은
시민들에게 외면당하거나
전경들에게 압수당한 유인물처럼
어려웠거나 투박했다
어쩌면 이성을 갈구하기 위해
수컷 공작새처럼
오히려 시대 감정을 훔쳤는지 모른다
한 여성 문인이 지난날을 폭로했다
괴물들의 시대였다고
문화적인 것으로 치장했던
수컷들의 모든 거짓 화관들을 쳐부수겠다고
그날로부터 난 뜨끔하다
식은땀이 난다 뒤를 돌아보게 된다
청년기가 소환되고
시대의 중앙선으로부터 비껴선
중년기도 소환된다
내 안의 내가 나를 사찰한다
여성 문인의 폭로는
전 세계 부르주아들을 벌벌 떨게 했다는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문처럼
뭇 남성들을 떨게 한다
남성들의 단발령에 거병한
옛 왕조가의 양반들처럼
한편으론 분개하지만
한편으론 부서져 내리는
자기 시대의 필연적 몰락을 예감한다
나는 시시때때로
내 안의 괴물을 깊이 응시하기로 했다
내 안에도 반인반수의 유전자는
늘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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